서울 저소득층이 강남 아파트 사려면 88년 — KB PIR 데이터로 본 주거 양극화의 현실
서울에서 소득 하위 20% 가구가 강남권 최상급지 아파트를 사려면 한 푼도 쓰지 않고 88년을 모아야 한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KB부동산 자료에 따르면 2024년 12월 말 기준 서울의 1분위 소득 대비 5분위 주택가격 PIR이 88.3을 기록해, 2023년 3월 이후 21개월 만에 최대치를 찍었습니다. 숫자 자체가 충격적이지만, 이 숫자가 말하는 맥락이 더 중요합니다.
PIR이란?
PIR(Price to Income Ratio)은 주택 가격을 연간 소득으로 나눈 값입니다. PIR이 10이면 소득을 10년치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서울 전체 중위 기준 PIR은 2024년 9월 기준 9.8로, 보통 서울에서 집을 사려면 약 10년치 소득이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문제가 된 수치는 이것보다 훨씬 극단적입니다. 소득 하위 20%(1분위) 가구가 가격 상위 20%(5분위) 주택을 살 때의 PIR이 88.3이라는 겁니다. 저소득층 기준으로 고가 주택을 사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를 보는 이 수치는, 부동산 시장의 양극화 정도를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지표입니다.
💡 PIR 88.3은 평균 수명보다 긴 시간입니다. 태어나서 일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한 푼도 안 써도 못 사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실제로 저소득층이 강남 아파트를 목표로 저축하지는 않겠지만, 이 수치는 두 집단 사이의 경제적 거리가 어느 수준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왜 지금 이 수치가 다시 올라오는가
이 지표는 2021년 11월 114.3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가, 금리 인상과 함께 집값이 조정되면서 2023년 이후 낮아졌습니다. 그러다 2024년 1월부터 다시 상승세로 전환해 12월에 88.3까지 올라왔습니다. 2023년 3월 이후 21개월 만의 최대치입니다.
상승의 배경은 명확합니다. 강남3구를 중심으로 고가 아파트 가격이 다시 빠르게 올랐기 때문입니다. 반면 저소득층의 소득은 집값 상승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고가 주택 가격과 저소득층 소득 사이의 간격이 벌어질수록 이 수치는 올라갑니다. 현재 속도대로라면 2021년 최고치 수준인 114까지 회귀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습니다.
저소득층과 고소득층의 현실, 얼마나 다른가
같은 데이터를 고소득층 기준으로 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소득 상위 20%(5분위) 가구가 중간 가격 주택을 사는 데 걸리는 시간은 4.73년, 고가 주택은 14.2년입니다. 저소득층이 중간 가격 주택을 사는 데 26.37년이 걸린다는 것과 비교하면, 같은 집을 두고도 접근할 수 있는 시간이 다섯 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이 격차는 단순히 소득 차이만을 반영하는 게 아닙니다. 고소득층은 기존에 보유한 자산, 투자 수익, 금융 접근성 등 다양한 자원을 갖추고 있는 반면, 저소득층은 소득 외에 기댈 수 있는 수단이 제한적입니다. 집값이 오를수록 자산을 가진 쪽은 더 빠르게 자산이 늘고, 가지지 못한 쪽은 따라잡을 가능성이 더욱 줄어드는 구조입니다.
이 수치가 정말 말하는 것 — 집값이 아닌 기회의 불평등
저소득층이 강남 아파트를 사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 간격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집값이 오른다는 건 집을 가진 사람의 자산이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집을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 사이의 자산 격차는 집값이 오를수록 자동으로 벌어집니다.
PIR 88.3은 집을 살 수 없다는 무력감의 숫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집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자산 형성 속도 차이를 나타내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주거 문제가 단순한 거주 공간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이동성과 계층 고착화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수치는 경제 불평등을 이해하는 핵심 지표 중 하나입니다.
📌 정부가 공공임대 확대, 청년 주거 지원, 무주택자 대출 혜택 등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고가 주택 시장은 이런 정책의 직접적인 영향권 밖에 있습니다. 저소득층의 주거 접근성을 높이려면 고가 주택 가격 자체를 건드리기보다 공공임대·사회주택의 질과 입지를 높이는 방향이 현실적으로 더 유효하다는 시각이 많습니다.
마치며 — 숫자 뒤의 사람들을 봐야 한다
88이라는 숫자는 통계입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서울에서 월세를 내며 언젠가는 집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PIR 수치가 오른다는 건 그 가능성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집값 양극화는 부동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지역에 살 수 있느냐가 교육, 의료, 생활 편의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다시 다음 세대의 출발선을 결정합니다. PIR 88.3은 서울 강남 아파트 한 채의 가격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마주한 구조적 불평등의 단면을 숫자로 보여주는 것입니다.